유라시아 영화 DB

  •   1. 소련영화의 탄생(1896~1917)
  •   2. 1917년 10월 볼셰비키 혁명과 영화
  •   3. 소련 무성영화의 개화기 (1920년대)
  •   4. 소련 유성영화의 등장과 사회주의 리얼리즘 (1930년대)
  •   5. 제2차 세계대전기의 소련영화 (1941∼1945)
  •   6. 전후에서 스탈린의 사망까지의 소련영화 (1946~1953)
  •   7. 소련 영화의 해빙기
  •   8. 소련 영화의 침체기
  •   9. 글라스노스트와 페레스트로이카 시기
  • 10. 포스트-소비에트 시기

초기 러시아 영화의 발생과 경향

 

러시아에서의 초기 영화 제작은 주로 직업 사진가들과 사진 애호가들에 의해 원시적인 활동이 시작되었다. 특히 하리코프의 사진가 페테쯔끼(А. Федецкий) 18961897년에 쿠랴즈스키 수도원에서 하리코프로 기적의 성상 그림을 옮기는 종교적 의식과 도시에서의 휴일 표정들을 촬영하였다. 또한 모스크바의 사진 애호가 중 한 사람인 코르쉬 극장의 배우 페드로브-사쉰(Федров-Сашин)은 극장 입구의 대중들을 찍어서 연극이 끝난 후 자신이 찍은 것을 보여주기도 하였다. 그리고 1900년부터 시작한 사진회사 간-야겔스키(Ган-Ягельский)에서는 러시아 황제의 위대함을 강조한 궁정 뉴스를 촬영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초기 러시아의 영화계는 절대적으로 수입 영화들, 특히 프랑스 영화들이 주류를 이루었다. 그 당시 영화 기자재와 영화 작품들은 파리의 몇몇 기업가들이 자국 프랑스의 영화 시장뿐 아니라 대부분의 유럽 국가들의 영화 시장도 지배하였다. 특히 파테사와 고몽사는 모스크바에서 자기들의 주요 대표부를 설치하고 러시아 영화 시장에 전략적으로 대처하기 시작하였다.

 

이 시대에 제작된 영화는 내용과 방법에 따라 크게 두 개의 그룹으로 나눌 수 있다.

 

첫째, 실제적 생활 사건, 즉 자연의 그림들과 정치적 사건, 다양한 민중들의 풍속, 과학적 현상들을 보여준 자연적인 다큐멘터리 영화들이었다. 그 형식과 내용의 조잡성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영화들은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다. 그것은 바로 미래의 계몽주의 영화가 바로 이들 영화에서 나타났기 때문이다.

 

둘째, 서커스와 가벼운 연극, 뮤지컬 등 극적이고 오락적인 요소를 보여준 영화들이다. 이런 부류의 영화들에서는 필연적으로 원시적인 이야기의 형태가 등장하게 되었고 그것은 바로 초기 러시아-소련영화에 자주 나타난 문학작품에 토대한 각색영화의 활발한 등장을 예고하였다. 이야기 구조를 가진 영화의 등장은 러시아-소련 무성 영화에서 표현 가능성의 확장을 유도하였고 특히 영화 카메라의 독특한 표현 방법의 발전을 촉진시켰다. 이와 같은 현상은 초기 멜리에스와 그의 추종자들의 트럭 영화에서 주로 나타났지만 나중에는 영화의 전 장르에서 나타났다.

 

 

러시아에서의 영화 제작

 

러시아에서의 규칙적인 영화제작은 19071908년부터 시작되었다. 이 과정은 1905년 혁명의 좌절 이후 가장 혹독한 반작용과 그 반향에서 비롯되었다. 혁명의 좌절 이후 인텔리겐챠들 사이에서는 염세적인 정서가 확산되었으며, 특히 문학과 예술에서는 데카당스파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었다. 이러한 사회적 상황으로부터 촉발된 인텔리겐챠들과 일반 사람들의 심리적 상황이 곧 러시아에서 영화 제작을 자극하게 한 또 다른 요인이 되었다.

 

이런 사회적 상황과 함께 자본가들은 새롭고 젊은 사업, 즉 영화에 관심을 집중했다. 그 결과 영화 제작은 물론 영화를 상영할 수 있는 극장과 시설에 대한 투자가 적극적으로 이루어졌다. 이제 몇십 개의 의자들 대신에 400600여 개의 좌석과 뷔페가 딸린 극장 상영관들이 특별히 지어졌다. 동시에 음악을 동반한 영사 시설의 질도 더욱더 좋아졌다. 따라서 1913년 무렵 러시아에는 이미 1400여 개 이상의 영화 극장이 존재하게 되었다. 영화는 일반 대중들의 볼거리로서 가장 인기있는 곳이 되었다. 이에 영화는 가난하고 지적 능력이 떨어지는 값싼 볼거리에서 부르주아 계급은 물론 일부 인텔리겐챠들까지 영화의 볼거리에 참가하게 되었다.

 

그러나 아직도 러시아 영화시장의 대부분은 외국인 회사들에 점유되어 있었다. 특히 시간이 지남에 따라 프랑스 파테사와 고몽사에 뒤이어 이탈리아, 독일, 미국 등의 영화사들이 차례로 러시아 영화시장에 진출하였다. 이들 영화사에 의해 들어온 영화들은 분명 다양한 세계 영화적 흐름을 알 수 있게 하였지만 동시에 러시아 영화 제작의 발전을 더디게 하는 요인이 되기도 하였다. 다만 1907년 가을부터 다소간의 러시아 뉴스 영화가 규칙적으로 제작되기 시작하였다. 이런 영화들 중에서는 궁정 부속영화사 간-야겔스키에 의해서 제작된 “제3의 국가두마(Третья Государственная Дума), “짜르의 열병식(Смотр войскам в высочайшем присутствии в царском селе)” 등이 최초의 뉴스 영화들이었다. 이러한 러시아의 사회적 이슈를 담은 뉴스 영화들은 많은 관객들이 흥미를 끌었다. 러시아의 사회적·정치적 이슈를 다룬 영화의 상업적 성공은 파테사와 고몽사의 모스크바 대표부에 즉각적인 영향을 주었다. 즉 영화제작에 있어 러시아 관객들이 흥미를 갖는 보다 현실적인 사회·정치적 테마를 자신들의 영화에 도입하였다. 따라서 이들 영화사는 러시아 내부 문제를 알리는 다큐멘터리 영화를 조직적으로 제작하게 되었다. 그러한 형태의 영화로는 파테사에서 제작한 “돈 까자크(Донские казаки)”가 특별한 성공을 거두었다.

 

 

1차 세계대전기의 러시아 영화

 

러시아 영화는 많은 다른 외국 영화사와 치열한 경쟁의 조건하에서 발생하였다. 19131914년 기간 동안에 모스크바 한 지역에서만 50여 개 이상의 외국 영화사 지부가 설치되었다. 각 지부 사무소에는 외국에서 수입한 값싼 필름으로 가득 채워졌고 관객들은 러시아 자국 영화에 대한 흥미에도 불구하고 영화의 중요성에 대해 아직 인식하고 있지 못했다. 이러한 인식의 부재로 극장가는 러시아 영화 한 편당 외국 영화는 무려 4편에서 5편의 비율로 열세를 면치 못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은 제1차 세계대전 초부터 점차 바뀌기 시작하였다. 전쟁으로 인하여 군수 공장의 활성화로 노동자들의 증가와 전선으로부터 쫓겨나게 된 가난한 사람들의 도시 유입으로 도시 인구는 빠르게 팽창하였다. 또한 경제 불황 등으로 화폐 가치는 하락하게 되었다. 사람들은 이런 상황이 빨리 지나가고 사라지기를 바라게 되었고 무엇보다 이런 상황을 잊고 싶어하는 심리적 도피 현상이 나타났다. 이러한 복합적인 상황으로부터 위안을 받을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것은 곧 영화라는 매체였다. 그리고 전쟁은 외국 영화 수입을 현저하게 감소시킨 반면 러시아 자국내 영화 제작의 빠른 성장을 불러일으키게 되었다. 그리하여 일련의 새로운 영화 사업가들 -에르몰리에프(Ермольев), 벤게로프(Венгеров)와 가르딘(Гардин), 하리토노프(Харитонов)- 과 영화사 <루시(Русь)>등이 이 시기에 등장하였다.

 

이들이 만든 영화에서는 소시민들의 삶과 정부 관료와 대형 사회적 사건들이 주로 묘사되었고 관객들이 흥미를 갖게 만들었다. 그리고 짜르 정부는 영화의 거대한 의미와 효과를 인식하게 되었고 영화로 하여금 정부의 정치적 목적과 의도를 선전하도록 하였다. 따라서 짜르 정부는 황제의 최고 기구인 “스코벨레브스키 위원회(Скобелевский комитет)”에 전쟁영화 분과를 설치하였다. 그래서 영화는 전선에서 촬영된 뉴스 영화 상영의 독립적인 권리를 가지게 되었고 선동적인 전쟁 극영화의 제작도 이 분국을 통해 이뤄지게 되었다. 그리하여 러시아에서는 정부가 영화를 이용하여 직접적인 정치 선동과 자신들의 정치적 목적을 구축하고자 한 첫 영화 사업이 발생하게 되었다. 이것이 비록 영화가 정치적 수단의 하위 개념으로 전락하였지만 러시아 정부의 적극적인 도움으로 영화 제작이 빠르게 발전할 수 있는 유리한 조건들이 형성되었다. 이런 결과로 러시아에서 영화 제작은 놀랄만큼 빠르게 성장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