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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의 그리스도 이미지는 3세기 경 등장하였다. 유대교는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 위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속에 있는 어떤 것이든지 그 모양을 본 떠”(출애굽기 20:4) 우상을 만들지 못하게 금하고 있었다. 그러나 기독교도들이 마침내 종교를 확장, 발전시키기 위해 예술을 도구로 삼았을 때, 그들은 미신적 요소와 로마의 다신들의 형상들을 포괄하는 등 다양한 문화지층을 수용하였다. 헬레니즘 예술로부터는 우아함과 명료함을, 로마 예술로부터는 형상의 배치나 대칭 기법을 받아들였으며, 시리아에서는 역동성과 힘, 이집트에서는 큰 아몬드형 눈과 길고 가는 코 및 작은 입 등의 표현 양식을 빌려왔다. 313년 그리스도교가 비잔틴 제국의 공식 종교가 되면서 이코노그래피가 활발하게 형성, 발전되었으며 그 기본적인 구조 및 토대가 만들어졌다.

 

초기 그리스 교부들은 이콘의 이미지에 표현된 성스러운 초월적 존재에 대한 엇갈린 관점을 보였다. 이는 이후 비잔틴 동로마 제국에서 벌어지게 될 8, 9세기의 이콘 논쟁을 예견하는 것이었다. 이와 같은 이콘의 성스러운 이미지에 대해 콘스탄티노플을 중심으로 활동하던 그리스 교부들은 대체로 찬성하는 입장이었지만 테르툴리아누스나 아우구스티누스와 같은 로마 지역의 라틴 교부들은 비교적 미온적인 태도를 보여주고 있었다. 표상 이미지의 전통이 강했던 페르시아나 시리아, 이집트 북부의 알렉산드리아 등지의 토착예술과 동방의 영향에 무관할 수 없었던 콘스탄티노플 교회의 교부들보다도 이미지에 대한 관심이 상대적으로 미약했던 것도 그러한 이유 중의 하나였다.

판토그라토르 이콘, 6세기

가장 오래된 정교회의 전승에 따르면 만딜리온에서 시작한 최초의 이콘은, 그리스도와 성모의 모습을 직접 그린 성 루가에 의해 이콘의 기법과 양식이 후대로 전달된다. 이콘은 로마 시대 파이윰의 엔카우스틱 초상화 기법을 반영하고 있으며 그 실증적 기원은 카타콤의 조야한 이미지들로부터 비롯된다고 앙드레 그라바르나한스 벨팅과 같은 미술사학자들은 밝히고 있지만, 지금까지 보존되고 있는 이콘들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은 시나이 지역 성 카타리나 수도원에 있는 6세기경의 판토크라토르 그리스도 이콘이다.

비잔틴 동로마 제국의 유스티니아누스 대제 시대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이 이콘은 이후 그리스도 이콘의 가장 전형적인 모델이 되는데, 이콘은 로마의 라틴 민족보다도 그리스, 소아시아, 시리아 지역의 동방 민족들에게 보다 확산되어 있었고 점차 주술적인 성격까지 띠게 되면서 그리스도교의 도그마를 뿌리째 흔드는 우상숭배의 대상으로 전락하기도 했다. 비록 이콘에 관한 교리가 692년 트롤로 공의회를 거쳐 787년 니케아 공의회에서 확정되면서 이콘의 성스러운 이미지는 보이지 않는 초월적 존재의 가시적 이미지로 간주되었지만 이콘은 그리스도의 본성이 아니라 성육신한 신성의 위격을 그리는 것이라고 결정되었음에도 이미지가 지니는 그 어떤은 항상 경계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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년 서로마가 멸망하고 이후 동로마가 로마 제국을 계승하면서 콘스탄티노플을 중심으로 발전하던 동로마-비잔틴 제국은 8, 9세기에 들어와 불안정한 국면을 맞이한다. 구상적 이미지를 혐오하던, 이콘 이미지 자체에 심한 거부감을 보이던 이슬람 세력의 끊임없는 침입과 이에 따른 이슬람 회교 문화의 영향, 유대 교회의 영향, 그리고 비잔틴 황제들의 권력 갈등으로 인해 제국의 통합은 위협에 처하게 되었으며, 이는 성상파괴논쟁으로 이어졌다. 성스러운 이미지에 대한 근본적인 입장을 드러내는 이 이콘 논쟁은 765년 레오 3세가 그리스도의 형상을 담은 십자가를 황궁의 청동문에서 떼어내 이콘숭배를 공식적으로 탄압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되었다. 레오 3세는 이슬람 회교의 침공에서 콘스탄티노플을 방어하였지만, 이러한 위기는 비잔틴 사람들이 그리스도와 성모, 성인들의 이콘 앞에서 모세의 율법을 어긴채 물질적 이미지의 우상들에게 기도드리기 때문이라며 이콘숭배를 탄압한 것이다.

 

레오 3세 및 전통적인 기독교도들은 종교적 이미지가 이교 숭배를 가져올 수 있다고 논쟁하며 성스러운 표상들을 계획적으로 파괴하였는데 이를 성상파괴주의(iconoclasm)라 부른다. 레오 3세는 이슬람 회교도들의 침공에서 콘스탄티노플을 방어했지만, 그는 제국에 닥친 이 같은 위기가 비잔티움 사람들이 그리스도와 성모, 성인들의 이콘 앞에서 모세의 율법을 어긴 채 물질적 이미지의 우상들에게 기도를 드리기 때문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리하여 726년 레오 3세는 콘스탄티노플 황궁의 청동 대문 위에 걸려 있던 판토크라토르 그리스도 이콘을 제거하면서 공식적으로 이콘 공경론자들(iconophiles)을 탄압하기 시작하였다.

- 이덕형, 「이콘과 아방가르드」, p.261


이러한 이콘 파괴론자들의 주장에 맞서기 위해 이콘 공경론자들은 이콘이 우상 숭배가 아니라는 믿을만한 논리를 내세워 반박할 수 있는 대변인을 찾아야만 했다. 이콘 공경론자들은 다마스쿠스의 요한네스의 관점에 교리적 기초를 두었다. “다마스쿠스 요한네스는 이콘 공경이 구약에서 금지하고 있는 우상에 대한 숭배의 부활이 결코 아니라,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삼위일체를 증명하는 닮음의 상징적 도구에 대한 경배라고 규정했다.

- 이덕형, 「이콘과 아방가르드」, p.262

 

이에 다마스쿠스의 요하네스는 레오 3세의 이콘파괴론이 단순한 이미지의 금지만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론 전체에 관계되는 정통 교회의 정체성 문제로까지 나아간다며 이콘숭배자들의 입장을 지지하였다. 즉 이콘은 신적 본성 자체가 아니라 성육한 신성의 위격으로, 이콘의 이미지는 상상력의 자의적인 사물이 아니라 그리스도 보편 교회의 오래된 전통과 정통성의 하나라는 것이다. 이렇게 이미지를 중심에 놓고 벌어진 그리스도론에 관한 논쟁인 이콘 논쟁은 거의 120여 년간(726-843)이나 비잔틴 제국 내부에서 지속되었다.

클루도프 시편의 삽화, 이콘 파괴론자들이
이콘을 지우는 모습

마침내 843년 비잔틴 제국 내에서 미카엘 3세의 이콘 숭배 인정으로, 이콘을 옹호하는정통 신앙의 승리가 결정되었으나 프랑크 왕국 카롤링거 왕조의 샤를마뉴 대제가 이끄는 라틴 지역은 콘스탄티노플에서 벌어졌던 이콘 논쟁과 그 결과에 대해 그다지 큰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프랑크 왕국의 세력 내부에 있던 로마 교회도 콘스탄티노플에서 벌어지던 이콘 논쟁에 개입하기를 꺼리고 있었다. 라틴 지역의 주도권을 놓고 벌어진 정치적인 알력에도 기인하지만 다마스쿠스의 요한네스나 테오도르 스투디오스와 같은 그리스 교부들의 이콘 신학, 즉 성스러운 이미지의 존재론적 성격에 대해 올바른 해석과 평가를 내릴 수 있는 전문지식이 라틴 지역에는 부재했던 것도 중요한 이유 중의 하나였다.

 

‘필리오케’ 논쟁으로 1054년 콘스탄티노플 교회와 로마 교회는 각각 사도들의정통성보편성을 표방하면서 동방정교회와 가톨릭교회로 분리되지만 콘스탄티노플 교회의 중요한 전례물이었던 이콘이 가톨릭교회에서는 교회 내부의 장식물 또는 글자를 모르는 신도를 위한 그림문자의 역할로만 머물러 있었다. 보이지 않는 초월적 실재가 눈에 보이는 빛과 색의 성스러운 기록인 이콘의 이미지를 통해 우리에게 현전할 수 있다는 상징적 매개성이 로마 가톨릭교회에서는 단순한 장식적 알레고리로 변모하게 되었고, 이 같은 장식적 성격은 이후 서구 유럽 교회예술의 발전과 이탈리아 르네상스 성화의 일부로 이어지게 되었다. ‘영원한 도움을 주는 성모이콘과 같은 가톨릭교회의 이콘도 있지만 여기서의 이콘은 정교회에서처럼 신자들이 전례의식에 따라 촛불을 봉헌하고 프로스키네타리온이나 이코노스타스 앞에 서서 오랜 시간 묵상을 하고 시선을 맞추는 그런 공경의 대상이자 전례물은 아니었다.

 

이콘숭배론자들의 견해는 콘스탄티노스 5세의 강압적인 통치로 인해 공식적으로 대두되지 못했다. 그러나 이콘 숭배가 이미 정착되어 있던 그리스 아테네 출신 이레네 황후의 통치시대에는 이콘의 부활을 도모할 수 있었다. 이레네 황후는 787년 니케아에서 제7차 공의회를 소집하였고 여기서 이콘 숭배를 공식화하는 결의문이 만들어졌으며 이후 이콘은 급속도로 발전하였다. 10세기 말에는 이콘의 형식이 확고하게 자리 잡았으며 불가리아, 세르비아, 러시아 등 다른 정교회 국가들로 확산되어 더욱 발달하였다.

 

이콘 논쟁은 이미지가 지니는 본질적 이중성을 드러낸다. 이콘을 옹호하는 이콘숭배자들, 즉 정교도들은 이미지 뒤에 보이지 않는 초월적 실재가 존재하며 이미지가 바로 그것의 상징이라 간주한다. 그러나 이미지를 문자 체계보다 열등하고 허상으로 보기 시작하는 이콘 파괴주의자들, 즉 서구 유럽적인 전통의 시각은 이미지가 단지 하나의가상에 불과하다는 물질주의적, 실증적 견해를 제시한다. 정교 문화는 이미지의 초월적 실재를 옹호하는 문화적 배경을 자신들의 이데올로기로 선택했고, 서유럽의 라틴, 게르만 문화는 이러한 문화에 대립되는, 즉 이미지의 가치를 부정하는 문화적 배경을 선택하였다. 이러한 이미지에 대한 견해 차이는 결국 두 문화권에서의 회화 예술의 특성과 발전방향을 규정하게 되었고, 더 나아가 이 두 문화권의 인식론적 기반을 이루게 된다.

 

동방정교와 카톨릭의 신 인식의 차이 역시 이와 무관하지 않다. 가톨릭의카타파시스적인 방법과는 대조적인 정교의아포파시스적인 방법은부정 신학(Negative Theology)'의 전통 속에 반영된다. ’카타파시스적인 방법의 신 인식은 신의 실재에 대한 교리적인 이해를 통한 논증적인 것으로, 점차적으로 이성과 합리를 통해 신의 실재에 점차적으로 접근한다는 것이다. 반면아포파시스적인 방법의 신 인식은 신의 실재에 대한 직관에 의한 즉각적인 깨달음, 침묵, 관조를 통해 의한 것이다. 정교의 이콘은 바로 이러한 관조의 장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