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정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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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정교회의 역사

러시아 정교회는 세계에서 가장 큰 독립 동방정교회로 신도 수는 2500만~5000만 명 정도로 추정된다. 비잔티움의 그리스 선교사들이 러시아에 전파한 그리스도교는 988년 성 블라디미르 대공이 통치하는 키예프 공국의 국교가 되었다.

1037~1448년 러시아 교회는 콘스탄티노플에서 임명한 수도 대주교가 통치했는데, 키예프의 그리스인 수도 대주교가 정교회와 로마 가톨릭 교회 사이에 일시적인 연합을 선언했던 피렌체연합(1439)에 서명한 후 러시아교회는 독립자치교회가 되었다. 그러나 1453년에 수도였던 콘스탄티노플의 함락과 함께 동로마 제국이 멸망함에 따라 러시아 정교는 독자적인 길을 걷게 된다.

한편 우크라이나에서는 명목상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구의 관할이었던 '키예프 및 전 러시아' 독립 수도 대주교구가 1458~1687년 폴란드 통치하에 있었다. 1596년 다수의 우크라이나 성직자와 평신도들이 브레스트리토프스크에서 로마가톨릭과 연합했으나, 1687년 키예프수도 대주교구가 모스크바 총대주교구에 재편입되고 19세기와 20세기에 폴란드가 분할되자 대부분 정교회로 되돌아왔다. 1721년 표트르 대제는 모스크바 총대주교구를 탄압해 국가의 엄격한 통제를 받는 신성종무원으로 대체했다. 총대주교구는 1917년 10월 혁명으로 비로소 부활되었다. 
        

              
  
1918~1939년 러시아 정교회는 공산당의 가혹한 박해를 받았다. 1922년 소비에트 정부의 지원을 받는 개혁운동의 일환인 갱신교회가 총대주교 찌혼의 교회에서 탈퇴하고, 신성종무원의 권력을 부활시키는 한편 성직자와 신도들을 분열시키자 러시아 정교회는 더욱 약해졌다. 찌혼이 죽은 뒤 정부는 총대주교 선거를 금지시켰다. 1927년 교회를 안정적으로 존속시키기 위해 수도 대주교 세르게이는 소비에트 정부에 대한 '충성'을 공식적으로 천명하였다. '정부에 충성'하는 태도는 교회 자체 내에 보다 큰 분열을 가져왔다.


그러다가 1943년 스탈린 종교정책의 갑작스러운 전환 덕분에 러시아 정교회는 놀랄만한 부흥을 이루었다. 새 총대주교가 선출되었고, 신학교들이 문을 열었으며, 수천 개의 교회가 활동을 시작했다.
1945~1959년에 비록 몇몇 성직자들이 체포, 유배되기는 했으나 교회의 공식적 조직은 크게 확장되어 문을 연 교회의 수가 25000개에 달했다. 그러나 1959~1964년에 흐루시초프 치하에서 교회에 대한 새로운 탄압이 광범위하게 시행되어 문을 연 교회 및 교회 기구의 수가 1만개 이하로 줄어들었다.

제2차 세계대전이후 모스크바 총대주교구는 소련 정부가 지지하는 평화운동을 비롯한 국제적인 활동에 적극 참여하여 다른 정교회들로부터 널리 승인을 받았으며, 이들과 모스크바 총대주교구 사이에 정기적인 상호방문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1948년 러시아 교회 독립 5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모스크바에서 열린 정교회 지도자 회의는 바티칸과 세계교회협의회가 '미 제국주의'와 결탁했다고 맹렬히 비난하면서 반서구적 입장을 채택했다. 이러한 입장은 스탈린이 죽은 뒤 수정되어 총대주교구가 세계교회협의회에 가입했으며(1961),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에는 로마 가톨릭 교회와도 우호적인 관계로 발전했다. 1991년 소연방붕괴이후에는 적극적으로 정부와 연대 및 협력의 관계를 지속하고 있다.


러시아정교의 교리

① 보편주의, 상호의존성, 겸손, 부활에 대한 확고한 믿음
- 사회적 평등의식과 자발적으로 조직되는 단일한 공동체 의식 향상

② 통일과 조화, 상호의존성 등이 기반이 된 종교문화 함축
- 성상화라는 상징을 통한 의미 표출 및 전달

역사 속에서의 러시아 정교문화는 현세지향적이었으며 국가에 종속적인 성격을 보여 주었다. 현세지향적이고 민족적인 문화와 국가종속적인 문화, 평등지향적인 농민공동체, 애국주의 등은 바로 상징이 재구성된 '사회적 실재'였다.

러시아 정교회에서 발견할 수 있는 러시아인들의 이러한 집단주의적 전통은 자연히 집단원칙에서 개인을 인식하며 사회이익에 개인의 이익을 복종시킨다. 그리하여 국가와 같은 사회적인 영역이 가장 우선적인 위치를 차지하며 개인의 다양성이나 개성, 자율성은 허용되지 않으며 모든 것은 인민이라는 집단 앞에 강제로 위계화되는 것이다.

러시아는 전통적으로 러시아정교의 '심포니아' 개념을 강조해왔다. 이는 국가, 사회, 교회, 개인이 상호 조화로운 세계를 창출하자는 정교 정신의 핵심이다. 즉 국가와 교회 사이의 조화, 협정, 연합 등으로 해석되었다. 이러한 전통적 개념은 포스트소비에트 시기에도 여전히 유효한 핵심적 가치로 수용되고 있다.

러시아정교 사상

이원론적 관점에서 러시아 정교의 사상을 관찰해보면 정교적 세계관과 범신론적 자연관이 이중 신앙 체계를 이룬 '성(聖)과 속(俗)' 이라는 체계로 이루어져 있다. 이중 신앙 체계란 비잔틴 정교를 수용하면서 루시의 동슬라브적인 요소들이 접목된 러시아적 기독교 신앙을 말한다.

끼예프 루시 때 받아들여진 비잔틴 정교를 잠시 알아보자면, 비잔틴 문화는 러시아 문화의 정신적 뿌리로써 러시아의 정신이 '동양적 기독교'에 근접하게 만들었다. 비잔틴 문화는 기독교적 요소에 그리스의 헬레니즘 문화와 동방적 요소를 가미한 문화이다. 따라서 서구 카톨릭과 다르게 헬레니즘적 요소와 동방의 장식적 요소, 초월적이고 신비적인 요소가 가미되었다.

예를 들어 서구의 '소리, 말 중심주의'와 이성적 특성과 달리 관조적이며, 이러한 관조적 체험을 가능하게 해주는 직관적이고 감각적인 요소인 빛과 색과 같은 시각적 요소들을 중시한다. 즉 카톨릭의 신 인식(카타파시스)은 인간의 언어에 의해서 신의 실재가 포착, 전달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또한 긍정적 정의 '~이다'를 통하여 신을 표현하고, 초월적 실재를 비유와 상징으로 나타낸다.

그러나 정교의 신 인식(아포파시스)는 하나님은 인간의 언어를 초월하는 존재이므로 긍정이 아닌, 부정적 방법으로 신을 정의하는 언어를 부정한다. 내세적이고 보수적, 금욕적인 비잔틴 문화는 끼예프 루시에서 위로부터 수용된 문화인 만큼, 주로 지배 계층의 문화인 '성'의 문화였고, 현세적, 개방적인 디오니소스적인 범신론적 자연관은 일반 민중들의 문화인 '속'의 문화였다.


기독교의 삼위일체


러시아 정교는 이 같은 이중 신앙 안에서 조화롭게 발전되어 나아갔고, 점차적으로 정교의 문화가 일반 민중들 사이에도 전파되어, 결국 러시아인들의 정신세계의 기반이 된다. 다시 말해 러시아 정교를 관통하는 핵심 키워드는 '성과 속'이다. 이중 신앙 안에서 형성된 러시아 정교의 사상에 대해서 더 알아보자면, 이중 신앙 체계의 가장 특징적인 것은 슬라브족의 자연신과 기독교 성인을 일치시키고, 기독교의 삼위일체의 교리를 범신적 세계관의 신들을 통해 이해하는 것이다.


러시아정교의 특징

러시아 정교의 특징은 교권이 세속적 권력, 즉 왕권, 또는 국가권력을 정당화시켜주는 도구로 사용되었다는 점이다. 러시아 정교는 키예프 루시가 정교를 받아들일 때부터 국가의 필요에 의해 선택적으로 받아들여진 종교에서 출발했으며 이후 모스크바 공국의 왕권이 강화되면서 이를 정당화시켜 주는 역할을 하다가 1721년 표트르 대제가 총대주교제를 신성종무원으로 대치하면서 완전히 국가에 종속된 기구로 전락해 버렸다.

원래 동방정교에서의 교회-국가관계는 통치자의 영역과 하나님의 영역간의 조화로운 관계를 추구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어떠한 것도 사제의 존엄성으로서의 황제의 근심거리가 되어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그들이 지속적으로 하나님을 찬미하는 것은 제국의 복지를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러시아 정교는 비잔틴의 이러한 조화(symphonia)에 대해 도덕적 권고와 적절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역할을 담당하는 것으로 규정지웠다.

러시아정교가 세속적인 권력에 종교적 합법성을 부여해 준 것은 왕권의 강화와 국가권력의 확립이 본격적으로 이루어지던 모스크바 공국 시기였다. 타타르 세력을 물리치고 노브고로드를 해방시키면서 모스크바의 대공이 러시아의 유일한 지배자가 된 후 러시아는 국가 정체성 확립이라는 문제에 직면하였는데, 여기에서 정교회는 '제3로마론'이라는 이데올로기를 통해 러시아인들에게는 정신적 통합을, 그리고 왕권에게는 합법적 정당성을 부여하게 된다.

15세기 쌍두독수리 문양(이반 3세)


이에 따라 이반 3세가 콘스탄티노플의 마지막 황녀인 소피야와 결혼하고 비잔틴의 쌍두 독수리 문장의 도입, 그리고 자주적 지배라는 의미의 차르 호칭을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러시아 차르는 정치적 측면에서 자신이 콘스탄티노플의 후계자라는 점을 강조하면서 유럽으로부터의 간섭을 거부할 명분이 생기게 된 것이다.

러시아정교회의 가장 큰 특징은 종교체계와 사회체계가 지나치게 용해되어 있다는 점이다. 러시아 정교는 도입부터 국가의 필요성에 의해 선택적으로 수용되었으며 이후 국가의 권력이 강화되었으며 국가에 종교적 정당성을 제공해 주는 수단이 되었다. 그리고 그것은 교회와 국가의 조화라는 논리를 통해 국가권력(자)의 모든 것에 종교적 신성함을 부여해 주었다. 바로 이러한 이유로 러시아 정교회는 이후 농노제나 차르체제 등의 사회적 문제에 대해 어떠한 저항도 거의 시도하지 않았던 것이다. -- 러시아정교와 메시아니즘 (김정훈  <서양사학연구 14집> 에서 발췌) 

원래 메시아니즘이란 고대유대인의 종교사상으로서, 언젠가 지상에 구세주(메시아)가 나타나 유대국민을 구원한다는 메시아 대망론을 말한다. 러시아인을 유대인과 더불어 메시아 대망의식이 특히 강하다고 하는데, 이 메시아니즘은 시대에 따라 여러 모습으로 발달해왔다.

동방교회로부터 그리스 정교를 받아들인 중세러시아에서는 로마카톨릭세계에 대해 정교세계의 독자성을 강조한 나머지 정교도 러시아인만이 진정한 기독교도이며 인류구원를 위해 신에게 선택된 메시아적 민족이라는 신앙이 싹텄으며 이것이 러시아 메시아니즘의 특징을 이루게 되었다.

근대 러시아에 들어와서는 한편으로는 정교정신으로 서구문명을 보완하여 동서를 융합한 전 인류적 문명을 이룩하는 것이 러시아의 메시아적 사명이라는 의식으로 발전했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서구를 혁명사상이나 자유사상으로부터 구제하고 정교도 슬라브인을 이슬람교의 터키로부터 해방한다는 정치적 메시아니즘이 제창되기에 이르렀다.

혁명 후에는 자본주의세계에 대항해서 동구와 소련을 지키고 제국주의의 압제와 침략으로부터 피억압국가들을 해방한다는 소비에트적 메시아니즘이 나타났다. 현대에도 국가적, 민족적 이해를 넘어서 핵전쟁의 위기로부터 인류를 해방하고 세계에 평화를 가져다주는 러시아라는 새로운 메시아니즘이 나타나고 있다.

다른 동방정교회와 달리 그 수용과 정착이 정치권력에 의해 주도되었던 러시아 정교회와 그 사상은 국가 발전과의 긴밀한 관계 속에서 변화해왔다. 비잔틴으로부터 유입된 러시아 정교회는 고대 러시아의 개국을 비롯하여 중세의 중앙집권국가로의 부상에 크게 기여하였으며, 오늘날까지 러시아 민족의 정신적 지주로서의 지위를 점하고 있다. 이는 러시아 정치사상의 근간을 이루고 있는 '성루시(Saint Rus)'와 '제3로마(Moscow-The Third Rome)'사상, 그리고 19세기 '메시아니즘'에서 사상적인 모티브를 찾을 수 있다.

이와 같이 러시아 민족에게 있어서 정교회와 정교이념은 정치, 사회, 문화적으로 큰 위치를 차지할 뿐만 아니라 역사적으로 국가위기 시 이를 극복하기 위한 민족적 정체성과 정통성의 모체가 되었다. 그러나 이 같은 정교회와 그 이념의 역사적 공적에도 불구하고 러시아 정교회는 강력한 정치권력의 그늘에 머물렀으며, 정교이념들은 그 본래의 종교적인 의미보다는 정치적인 도그마를 통해 러시아 정치문화 속에 수용되었다.

1995년 러시아 학술원의 사회정치분석 연구소에서 실시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응답자 중에 스스로를 정교신자라고 답한 사람들이 45% 이상 되는 것으로 나타났다(사회정치연구소 1996, 98-99). 이것은 70년간 계속되었던 공산체제 속에서 러시아인들은 종교의 자유를 상실하였고, 오히려 정교회 지도자들이 국가비밀기관의 요원으로 전락되는 종교적 고난 속에서도 자신들의 신앙과 민족정신을 잃지 않았다는 증거가 된다. 즉 격변하는 러시아의 정치역사 속에서도 러시아 정교회는 국민들에게 변치 않는 민족정신의 지주로서 위치를 굳건히 지키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러시아의 역사와 민족적 정체성을 깊이 이해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러시아 정교회가 국가와의 관계 속에서 어떻게 그 모습을 발전시켜나갔는가를 살펴보는 것이 필요하다. 러시아의 전통적인 정치문화는 종교적 자긍심을 토대로 발전해왔다. 러시아 민족은 기독교의 이념을 수용하면서 고대 러시아인 '루시'를 열었다. 정교의 전래와 토착화 과정에서 러시아인들은 자신들을 '위대한 민족', 신으로부터 '선택받은 민족'으로 승화시켜왔다. '몽골 따따르의 멍에'라 불리는 200여년간의 민족적 수난을 러시아 정교의 이념적 기반인 '성루시'와 '모스크바-제3로마'사상으로 극복할 수 있었다.

더 나아가 19세기 많은 종교철학자들은 이를 근거로 러시아 민족의 세계적인 사명에 관한 논리를 펼쳐 나갈 만큼 정교문화가 러시아 사회에 끼친 영향은 지대하다고 주장했다. 국가 즉 통치자의 주도하에 시작된 정교의 전래와 중세 이후 정교가 러시아 민족종교로 토착화되는 과정에서 교회와 국가간의 관계는 다양한 양태로 나타나게 된다. '성루시'와 '모스크바-제3로마'사상과 같은 정교이념이 러시아의 민족문화 형성과 제국확립시기에 러시아 정치와 사회에 미쳤던 커다란 영향은 짜리(황제)와의 권력관계 속에서 잘 드러나고 있다.


 러시아정교의 위기와 메시아니즘

15~17세기 러시아 교회의 분열은 중앙집권의 강력한 짜리권력에 교회가 종속되는 결과를 초래했다. 러시아 교회의 혼란과 분열은 14세기 수도원 운동에서 유래한다. 소르강변에 암자를 짓고 살았던 닐 마이스끼(닐 소르스끼라고도 함. 1433-1505)와 볼로쯔끼 수도원의 이오시프 사닌의 갈등이 그들의 제자들에게 이어지면서 더욱 첨예화되었다.

이들의 갈등은 수도원의 토지와 농노의 소유권문제, 이단자에 대한 박해와 사형제도 전통에 관한 도덕적 정당성 문제로 초점이 모아졌다. 이들은 각각의 주장에 따라 소유파(이오시프)와 비소유파(닐 소르스끼)로 분류되었다. 소유파와 비소유파의 갈등은 교리적이고 종교적인 측면에서 비롯되었으나, 교회가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정치권력의 비호 하에 무력으로 문제를 해결함으로써 교회의 재산과 권위가 황제들의 강력한 권력 아래에 예속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17세기 초 '가짜 드미뜨리 사건'과 '폴란드의 간섭과 침입'으로 인해 '스무따'로 불리는 국가적인 혼란기를 맞이하게 되자 러시아 교회는 러시아인들의 일체감을 형성시켜 미하일 로마노프가 짜리로 즉위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었다. 비록 과거에 러시아 교회가 짜리와의 권력경쟁에서 소외되는 아픔을 겪기는 하였으나, 정교회의 주도하에 민족적 위기를 잘 극복함으로써 국가와 짜리의 권력 확립을 위한 초석의 역할을 하였다.

미하일 로마노프

이로 인해 교회는 과거에 실추되었던 위상을 다시 회복할 수 있게 되었고, 짜리와 원활한 관계를 유지하게 되었다. 교회와 사제들은 멀리 시베리아까지 교회의 행정기능을 확대시킬 수 있었으며, 국가로부터 면세특혜와 막대한 부를 축적하게 되었다.

그러나 또 다시 1654년 총대주교 니콘(1605-1681)의 교회개혁으로 인해 러시아 사회와 교회에 지울 수 없는 파문과 충격을 안겨주었다. 순수한 교회제도 개혁을 목표로 시작된 움직임이 결과적으로는 구교도의 박해와 순교로 이어지고 말았다. 결국 1666~1667년 종교회의에서 개혁에 대한 반대자들을 파문시키고, 이 문제에 대한 해결을 국가권력에 일임하게 되었다. 러시아의 종교철학자 제르노프는 이 사건에 대해 '승자가 없는 싸움'이었으며, '제3로마'사상의 의미가 깨진 것이라고 평가했다.

예식서를 개정하는 총대주교 니콘


'라스꼴(교회분열)'은 총대주교 니콘과 사제 아바꿈의 죽음, 구교도의 시베리아 유형과 외국으로의 도주 등으로 결말을 맺었으며, 이러한 결과로 인해 사회경제적인 측면을 비롯하여 국민적 일체감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그뿐만 아니라 교회와 국가의 밀월협력관계는 깨어지고, 교회는 구 권위를 상실하여 다시 짜리의 수중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이후 뾰뜨르 대제(1689-1725)의 처세기간 중에 교회는 더욱 위축되어 자치권을 잃고 정치기구의 하나로 전락되고 만다. 뾰뜨르 대제는 러시아를 사회, 정치, 경제 전반에 걸친 개혁을 통해 서유럽의 수준으로 끌어올리려 했다. 그는 제정 러시아의 중앙집권적인 기틀을 마련하기 위하여 꼴레기야제도를 도입함으로써 각각 세속과 교회를 대표하는 원로원과 종무원을 설치하였다. 이에 교회는 뾰뜨르 대제를 교회의 보호자이고 절대적이니 권한을 가진 존재로 만들어 주엇다.

러시아의 짜리는 이전에 총대주교가 행사하던 교회에 대한 행정적 결정권과 권위를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으나, 종교적인 결정권은 종무원으로 넘겨버렸으며, 정교신앙의 기본적인 교리나 전통, 신앙의 기초적 내용은 그대로 존립시킴으로써 다른 동방교회들과의 공동체적 유대관계를 유지하였다. 종무원의 기능은 교회에 대한 국가의 통제와 요구에 대한 통로역할로 전락되고 말았다.

절대왕권의 강화로 인한 교회의 예속에도 불구하고 러시아 교회는 여전히 법전이나 짜리의 대관식 등 국가행사에 없어서는 안 될 귀중한 존재로 남게 되었고, 국가와의 원만한 관계 속에서 경찰과 군대의 지원을 받아 구교도와 타 종파의 개종을 위해 '전 러시아정교 선교협의회'를 통해 선교활동을 강화하기도 했다. 뾰뜨르 대제의 교회개혁으로 비롯된 교회와 국가의 관계는 1917년까지 그 전형적인 틀을 유지하였다.

결국 러시아 정교와 정교이념은 정치권력의 강도에 따라 그 발전의 방향이 크게 달라져 온 것을 알 수 있다. 강한 정치권력에 대해서는 그 세력이 위축되어 잠재된 민족정신으로 존재하다가 국가의 위기상황이나 정치권력이 동요되는 시기에 있어서는 민족의 정신적 지주로서의 역할을 십분 발휘하였던 독특성을 발견할 수 있다.

뾰뜨르 대제의 교회개혁으로 인해 러시아 정교회는 국가기구의 하나로 전락하면서 개국 초기 '성루시'와 '제3로마'사상의 신성성을 상실하고 세속화되어갔다. 역사적으로 정치적 혼란기나 민족국가 형성기에는 정신적 지주로서의 역할을 다하였던 정교이념과 정교회가 국가의 정치적 안정과 발전과정에서는 소외된 채 그 본래의 권위마저 상실하는 위기에 빠지는 경우가 드물지 않게 발생하였다.

이러한 현상에 대해 베르쟈예프는 "러시아는 유일한 정교왕국이며, 첫째와 둘째 로마처럼 강력한 통치력은 이후 제국의 황제들과 나아가 소비에트 정권 아래 제 3인터내셔널로 왜곡되었다"고 러시아의 전제적 정치 리더십을 비판하였다. 국가교회로 전락된 러시아 정교회는 신앙의 본래적인 의미보다는 국가발전이라는 대명제를 수행하기 위해 짜리에게 충성을 맹세하는 신하의 존재로 변질되고 말았다.

19세기 러시아 철할자들은 정교회를 예속시키고 정교이념을 정치화하였던 러시아 군주들의 전제성을 비판하고 정치권력과 교회의 관계에 대하여 그 이상적인 모델을 제시하였다. 과거 러시아 역사 속에서의 전제군주를 '적그리스도'의 출현에 비유하고, 러시아 사회를 구원할 영우적 지도자상을 고대 루시의 성인들과 구약성서에 나오는 모세와 다윗, 솔로몬 같은 이상적인 인물들을 지도자의 모델로 제시하여 교회와 국가가 서로 협력할 것을 주장하였다. 이는 '합일의 조화'원칙, 즉, 영혼과 육체가 완전한 조화를 이루는 것과 같이 권위의 근원인 신으로부터 동일하게 유래된 교회와 국가는 인류의 행복을 위해 서로 도와야 한다는 '비잔틴적인 유토피아'론이다.

이에 반해 솔로비요프는 '자유주의적 신정론'을 전개하여 비잔틴적인 정치전통을 러시아에 적용시키는 것에 대해 꺼려하였다. 교회는 국가기구가 아니라 사회조직으로서 도덕적이고 종교적인 사회기반으로서의 위상을 회복해야 하므로 교권과 속권이 분리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여 이상적인 지도자 상으로 선지자와 제사장, 그리고 왕을 기능적인 측면에서 분화시켰다. 이와 같이 전통적으로 강한 러시아 정치권력에 부정적인 시각을 갖고 있던 사람들에게 세속적인 정치권력까지 포괄할 수 있는 또 따른 사상의 필요성이 요구되었다.

19세기 후반 전 유럽사회의 급변하는 정세에 적응하며 20세기의 혁명을 잉태하고 있었던 러시아는 정치, 사회적으로, 정신적으로 불안을 내포하고 있었다. 이때부터 종교사상가들 사이에서 '러시아의 메시아적 사명'에 대한 논의가 뜨거워지기 시작하였다. 즉 과거의 짜리와 교회의 왜곡된 역사적인 관계를 청산하고 고대 루시의 기독교 정신을 계승하므로 전 세계와 신 앞에서 하나로 통일되어 세계평화와 자유를 위해 헌신해야 하는 사명이 러시아 민족에게 주어졌다는 주장이다.

따라서 러시아의 사상가들은 '메시아니즘'의 '선택된 민족'이라는 개념을 통해 정교회와 러시아 민족의 정체성을 재정립하고자 노력하였다. 유대민족이 구양성서적인 관점에서 자신들을 '선민'이라고 일컫는 것과 마찬가지로 러시아인들도 러시아 기독교의 유래와 '성루시', '모스크바-제3로마'사상이 자신들의 '선민'의식과 깊은 연관관계를 갖고 있다고 주장하였다. 이스라엘 민족이 성서 속에서 '선민'으로서의 정체성을 찾았던 것과 같이 러시아는 성스러운 국가이며 러시아 민족은 '선택된 민족'이므로 신과 세계 앞에서 자신들의 사명을 느껴야 한다는 것이다.

과거의 유대적 메시아니즘은 지상왕국의 확립과 현세적인 축복을 위해 사용됨으로써 그리스도와는 대립되는 부정적인 측면을 가지고 있었으나, 이제는 그리스도가 모든 사람들을 위해 왔으며 그리스도교는 전 인류와 전 세계를 위한 신약적인 의미의 메시아니즘이 필요하다는 주장이다. 즉 사상가들은 러시아의 철학적 토양과 기독교적인 특징을 조화시키고 있다. 이것은 고대 루시 일라리온의 "율법과 은총에 관한 말씀"과 동일한 논리를 함축하고 있는 것이다.

19세기 민족 이데올로기로서 러시아 지식인 사회를 매료시켰던 메시아니즘은 러시아 사회의 정치적 안정과 민족적 열등감을 해소하기 위한 이념적 처방이었다. 특히 베르쟈예프, 불가꼬프, 브이쉐슬랍쩨프, 까르따쉐프, 뜨루베쯔꼬이등 종교사상가들에 의해 더욱 강조되었다. 그러나 20세기 초 소비에트 사회가 형성되면서 메시아니즘은 레닌과 스탈린에게 이념적 토대를 빼앗겼다. 결국 메시아니즘 역시 '모스크바-제3로마' 사상과 마찬가지로 새로운 소비에트 사회를 구성하는 과정에서 정치적인 지지기반을 보유하지 못한 채 또다시 홀대를 당하는 신세로 전락하고 말았다.

베르쟈에프


소연방은 정교회의 이념 대신에 공산주의 이념을, 레닌을 민족의 메시아로 받아들이게 되었다. 러시아 메시아니즘은 페레스트로이카 이전까지 러시아 사회에서 '이단사상'으로 내몰렸고, 러시아 정교회는 타율적 혹은 자율적으로 소비에트 정부에 충성을 맹세하고 자신으 신도들을 비밀경찰에 넘겨주는 일까지 담당하게 되었다. 그러나 페레스트로이카 이후에 러시아 사회는 소비에트 체제 이전의 '사상적 르네상스' 시기를 동경하게 되고, 정교회와 정교회 문화를 복고시키려는 강한 의지를 보이고 있다.

이는 지금까지 살펴본 바에 의하며 과거 17세기 '스무따'로 불렸던 정치, 사회적 혼란을 정교회가 국민적 일체감을 형성하여 회복시켰던 것과 같이, 현대 러시아 역시 정치, 경제적인 혼란과 몰락을 정교문화를 통해 극복함으로써 민족적 정체성을 확립하려는 의지의 표명이라고 분석할 수 있다.

요즘 러시아 사회는 그동안 금지되어 있던 메시아니즘과 그 사상가들의 서적들이 대중화되고 있다. 뿐만 아니라 1988년에는 정교회 전래 1000년을 기념하는 대대적인 행사가 거행되었으며, 국가적인 행사에 대통령과 함께 총대주교가 나란히 참석하는 등 정부와 교회간의 새로운 관계가 설정되고 있다. 러시아 정교회는 70년의 수난기를 벗어나면서 다시 러시아인들의 정신과 가슴에 민족적인 자긍심을 제공해주고 있다.

현대 러시아는 개방과 자본주의의 유입을 통해 경제, 정치적으로 혼란과 민족적 자괴감에 시달리고 있다. 그러나 러시아인들의 정신 속에는 현재 국가의 위기극복에 대한 낙관과, 세계역사 주도에 대한 민족적 책임감과 자긍심을 상실하지 않으려는 의지가 내재하고 있다. 러시아으 역사전개 과정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이러한 의지는 러시아 정교의 '제3로마' 사상과 '메시아니즘'을 통해 다시 재현될 가능성이 있다는 점을 배제할 수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