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즈베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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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즈베크 민족기원과 역사>

  
   우즈베크 민족의 형성은 어떤 방식으로 이루어졌을까? 15세기 새로운 칭기스 칸의 지도자는 ‘울루스 주치’에서 탄생되었다. 1428년에 중앙아시아를 지배하고 있던 칭기즈칸의 아들인 주치의 아들 샤이바니의 자손인 아불 카이르(Abu'l Khayr)가 지금의 중부 및 북부 카자흐스탄 지역을 중심으로 우즈베크 칸국을 형성하였다. 우즈베크는 어떠한 경로로 정주문명을 받아들이게 되었으며, 그 배경은 어디에 있었던 것인가? 아불 카이르 칸이 1430-31년에 티무르제국의 지역인 호레즘으로 진입하면서 티무르제국을 정복한 것이 결정적인 시초가 되었다. 그는 자신의 통치적 중심지로 시르다리야(Syr Darya) 중류 동쪽에 위치한 시그낙을 선택하였는데, 이것이 우즈베크 민족이 정주 문화를 가지게 된 배경이었다.


    ‘아불 카이르 칸’ 은 칭기스칸의 네 아들 중 맏아들인 울루스 주치(Ulus Jochi)의 후손이었다. 그는 중앙아시아의 동쪽 지역에 추종자들을 규합하였고, 1428년에 스스로 칸으로 선포하면서 한동안 우랄에서 ‘시르다리야’의 북쪽까지 세력권 안에 넣었으며, 우즈베크 칸국의 역사적 형성은 이로부터 시작되었다. 1450년대에 아불 카이르 칸은 오이라트(Oirat)에 심각한 패배를 당하였다. 그 결과로 칭기스 칸의 후예들인 두 명의 지도자, 즉 ‘쟈니벡’(Janibeg)과 케레이(Kerei) 등 또 다른 주치 계통의 지도자들은 아불 카이르 칸에게 등을 돌리고 새로이 세력을 규합하였다. 이들이 이후 카자흐 민족 그룹으로 분화한다. 이들은 1460년대 중반에 자신들을 지지하는 부족들과 함께 서 무굴리스탄 에서 아불 카이르의 영토로 이동하였다. 아불 카이르는 이들에 대한 정벌에 나섰다가 1468년 쟈니벡과의 전투에서 전사하였다. 우즈베크와 카자흐 간의 정치적 대립은 15세기가 끝날 때까지 지속되었다.


    아불 카이르 칸의 영향력이 급속히 상실된 이유는 어디에 있었을까? 그것은 당시에 그에 저항하는 분위기가 형성되기 시작하고 아불 카이르와 구별되는 또 다른 칭기스 칸 라인의 리더십 아래에서 부족의 자주성을 유지하고자 하는 열망에 의해 새로운 지도자들이 출현한 것으로 해석된다. 아불 카이르에 대항하는 그룹을 지칭할 때에 사용되던 용어가 투르크어로 Qazaqa (혹은 Qazaq-Uzbeks) 였는데, 이는 변절자라는 의미이다. 아불 카이르는 그들을 공격하였으나 패배했고 1468년에 죽었다. 쟈니벡과 키레이는 추종자들과 함께 북쪽으로 가서 아불 카이르 칸의 대부분의 지역을 점령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불 카이르 칸의 원래의 동맹체는 건재했다.


  아불 카이르 칸의 지위는 손자인 ‘무하마드 샤이바니’(Muhammad Shaybani)’에 의해 계승되었다. 그는 어린 시절에 트랜스속시나의 티무르와 모굴의 보호 하에 추종자들과 함께, 티무르 제국에 속한 부하라 시에서 2 년 정도 보냈다. 16세기 초에 샤이바니 칸은 군대를 집결했는데, 규모는 5 만 명 에서 6만 명 정도였다. 많은 병사들은 여전히 카자흐 민족의 관습대로 살고 있었지만, 이 시기에는 전격적으로 아불 카이르 방계로 편입되었다. 이 군대의 힘을 빌려 샤이바니는 티무르 후손들로부터 트란속시아나를 쟁취하였다. 바로 이 국가가 우즈베크 칸국의 시초가 되었고, 러시아의 중앙아시아 정복까지 지속되었다. 샤이바니와 함께 북쪽 스텝지역에서 내려온 거주민들은 샤이바니가 일정한 시간을 보내었던 트란속시아나의 주민들과는 구별되었다.

 
   트란속시아나를 점령하던 시기에 케레이와 쟈니벡은 노마드 추종자들과 함께 북쪽 스텝 지역에 머물러 있었다. 이 연합체는 분리된 왕조의 이름이 아닌 카자흐로 명명되었다. 카자흐 민족은 신중하고 보수적인 유목 생활을 영위하였다. 이때부터 우즈베크라는 용어는 초원 지대의 노마드로 인식되지 않고, 트란속시아나 지역 주위의 샤이바니 칸의 리더십에 포함된 그룹을 지칭하게 되었다. 16세기에 들어와 중앙아시아 거주민들은 우즈베크와 카자흐 민족으로 이전보다 더 분명한 형태로 분화되기 시작했다. 우즈베크 민족 그룹이 정주 문화의 생활양식을 수용함으로써 중앙아시아 거주 민족들의 역사적 분할은 가속화되었다. 전통적인 유목문화의 형태를 가진 중앙아시아의 역사에 있어서 우즈베크 민족이 선택한 문화 양식은 다른 민족들과의 근본적인 차이점을 유발하였는데, 남서쪽의 투르크멘 민족과 아시아 스텝 지역의 카자흐, 키르기즈 민족은 유목 문화 양식을 지속하였다.

  
   중앙아시아 역사에서 ‘우즈베크’ 명칭은 특이하다. 14세기 몽골제국 멸망 이후 ‘우즈베크 칸’이 중앙아시아를 통치했는데, 이때 ‘우즈베크’ 민족 그룹이 최초로 등장했다. 15세기 초원의 유목민족 우즈베크 족은 중앙아시아 정착지역을 침공하여 장악하였다. 티무르제국이 15세기에 급격히 약화되자, 우즈베크 족은 티무르제국의 수도였던 사마르칸트를 점령하고 왕조를 세웠다. 과거의 우즈베키스탄은 부하라 칸국, 히바 칸국 으로 세력권을 확장하고 정착 민족의 길을 걸어갔다. 부하라 칸국은 16세기부터 19세기까지 존속한 공국이다. 19세기 이후로 제정러시아는 이 두 칸국을 붕괴시킨다.


   우즈베크는 정착 민족이라는 의미로 간주된다. 이 용어는 또한 정착 문화에 동화된 노마드로 인식되기도 하였는데, 이 용어도 비하된 의미로서 투박한 노마드로 해석되기도 하였다. 우즈베크는 정착민족의 의미보다는 노마드 문화를 가리키는 열등한 의미로 사용되었다. 우즈베키스탄의 국가 창건자인 ‘아불 카이르’ 칸이나 ‘무함마드 샤이바니’는 우즈베크라는 이름을 사용하지 않았다. 15-16세기 샤이바니의 정복 시기에 티무르와 모굴의 관련자들은 샤이바니의 스텝 추종자들을 우즈베크라 명명했고, 그들을 모굴, 차가타이, 카자흐와 엄격히 분리시켰다. 17세기 후반기에 우즈베크라는 용어는 우즈베크 칸국의 투르크-몽골 거주민들의 왕조가 아니라 지역 부족민들을 부르던 용어로 통용되었다. 그러나 우즈베크가 가장 빈번히 사용된 부분은 동 울루스 주치 계통을 상징할 때였다. 울루스 주치는 칭기스 한의 장자인 주치의 후손들을 의미한다. 이후 17세기 후반기에 우즈베크라는 용어는 우즈베크 칸국의 투르크-몽골 거주민들의 왕조가 아니라 지역 부족민들을 부르던 용어로 통용되었다.


   1920년대 볼셰비키 혁명 이후에 중앙아시아는 신생 소비에트 공화국에 편입된다. 우즈베크 민족도 볼셰비키 혁명 전에는 ‘우즈베크’라는 특별한 민족 정체성을 가지고 있지 못했다. 왜냐하면 우즈베크 민족은 소위 단일 민족이 아니고, 이 지역에 분포되어 살고 있었던 부족들의 연합체 성격을 가지고 있는 그룹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단지 씨족이나 종족 단위의 공동체적 삶을 영위하고 있었고 20세기 이전까지만 해도 우즈베크 민족은 16세기 이래로 이 지역을 정복하고 통치한 다양한 칸국에 의해 다스려졌다. 


   현재 우즈베키스탄의 대통령은 ‘이슬람 카리모프’이다. 그는 과거 공산주의 체제와 유사한 권위주의 체제를 확립한 지도자이다. 카리모프는 입법권, 사법권, 행정권을 장악하고 모든 관공서의 책임자를 임명하고 150명의 대통령 위원회를 친정 체제로 관장하고 있다. 그는 지방 행정 책임자까지도 임명하는 막강한 권한을 누린다. 카리모프의 막강한 권력을 두고 ‘독재형 극단적 보수주의자’ (autocratic immobilism) 이라고 부른다. 우즈베키스탄은 강력한 대통령 중심주의를 적절히 활용, 민족주의 정책을 적극 추진할 수 있었다. 이런 과정 중에 이슬람 원리주의 세력이 넓게 확산되었고 수백 명이 사망한 안디잔 사태가 일어났다.

  
   우즈베키스탄의 대 이슬람 정책에서도 이 같은 경향이 나타난다. 우즈베키스탄에서 원리주의 세력이 출현하였지만, 정부는 IMU (Islamic Movement of Uzbekistan) 등 원리주의 단체를 강력히 탄압해왔다. 정부는 이들의 과격성이 정부를 전복할 수도 있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중앙아시아 중에서도 이슬람 전통과 원리주의가 가장 강하게 퍼져있는 나라는 우즈베키스탄이다. 1999년 타시켄트 에서의 대통령 암살을 위한 테러사건이 벌어진 이후, 정부는 이슬람 원리주의 운동을 강력하게 탄압하고 있는 상황이다. 우즈베키스탄에서는 종교적 휴일이나 장례식, 결혼식 등 기념행사에서 이슬람식 전통 의식이 매우 강하게 남아있다. 현실적으로 우즈베키스탄 세속 정부는 이러한 민족성의 특징 자체를 완벽히 없애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카리모프 대통령은 중앙아시아를 둘러싼 국제관계에서 러시아와 미국 등 서방 국가 사이에서 탈러 정책과 친러 정책을 반복하는 입장을 보여주고 있다. 포스트 소비에트 공간에서 대표적인 탈러 국가 성향을 보여주고 있는 GUAM에 한때 가입했다가 탈퇴하면서 지금은 친러 입장을 보이고 있다. 카리모프 대통령이 최근 친 러시아 입장을 보인 이유는 그의 독재정치에 반대해서 일어난 궐기를 무력으로 강제진압, 수백 명의 사망자가 생김으로써 자신의 통치 기반이 매우 위태로운 상황에 놓여있었기 때문에 러시아의 도움이 절실히 필요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현재 카리모프 대통령이 행하는 민족주의 정책이라는 것은 자신의 정권을 지키고자 하는 수단으로 활용되고 있는 것이다.


   현재의 중앙아시아가 속한 지역은 과거 투르키스탄으로 불렸다. 제정러시아는 투르키스탄을 점령하였으며, 이 지역은 당시 1850년대 크림전쟁의 굴욕적인 패배로 인하여 민족적 사기가 떨어진 러시아인들에게 일종의 보상심리를 가진 영토로서의 의미를 가졌다. 러시아는 1860년대에 농노해방 등을 중심으로 사법개혁 등 대개혁의 시기로 접어들었다. 러시아의 국내 사정은 당시에 매우 복잡했다. 투르키스탄은 투르크 민족의 거주지였지만, 러시아인들은 타 민족이 거주한 이 땅에서 승리와 영광에 대한 열망을 가졌으며, 이곳은 보상받고 싶은 욕구를 가진 땅이 되었다. 러시아는 투르크 문화를 가진 이 지역을 점령하고 제국의 남쪽 경계를 방어할 수 있었으며, 동방에서 영국의 팽창에 맞설 수 있는 명분을 가지게 되었다. 러시아 인들의 입장에서도 투르키스탄은 매우 의미심장한 땅이었다. 그것은 제국주의자들에게는 단지 투르크민족 만의 땅은 아니었던 것이다. 근대에 들어와서도 소련 내에서 범투르크 민족주의가 등장한 것은 역사적으로 투르크 민족주의의 영향을 받아서 탄생된 것이었다.


   중앙아시아 투르크 민족들은 오스만 터키의 술탄과 칼리프 지위에서 그 영향력을 강하게 받았으며, 이는 투르크 문화의 전 세계적 현상이며, 투르크성이 매우 강력히 나타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증명한다. 소련 내 투르크 민족주의자들에 있어서 공통된 특성은 투르크 민족 간에는 상호 연대 의식이 있었다는 점이다. 투르크족 공동체 의식은 기본적으로 범이슬람주의, 범투르크 민족주의 등을 통합하는 구심적 역할을 가졌다. 중앙아시아 국가들의 인구의 90% 정도가 투르크계이다. 그리고 투르크족의 90% 이상이 무슬림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는 중앙아시아가 전통적인 투르크성을 가지고 있음을 의미한다고 하겠다.


<참고 >
정세진, “우즈베크와 카자흐 민족의 문화 유형 담론과 분화 과정 고찰” 슬라브학보, 24권 4호>,
정세진, “좋은 사회”로서의 중앙아시아 권역권의 소통 문화와 정체성“ 슬라브학보 30-1호, 2015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