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적 사건 속의 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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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적 사건 속의 옷

 

이반4세의 대관식과 모스크바공국 시대의 옷

 


대관식을 명령하는 이반 4


이반 4세의 성대한 대관식이 이루어졌던 1547년은 그의 실질적인 통치가 시작된 해로 간주되고 있다. 1546 12월 당시 모스크바공 이반 바실리예비치는 16세였다. 그는 모스크바 대주교와 구귀족들을 불러놓고 결혼하겠다고 의사를 밝힌 자리에서 자신은 대공(velikii kniaz,' великий князь)가 아니라 군주 짜르(velikii gosudar' tsar', великий государь тярь)로서 즉위하겠다는 입장을 덧붙였다. 그는 다음과 같은 긴 호칭을 갖추었다. , “전 러시아, 블라디미르, 모스크바, 노브고로드의 대군주 짜르이자 대공인 이반 바실리예비치, 카잔의 짜르, 아스트라한의 짜르, 프스코프의 군주, 스몰렌스크, 트베르, 유고르, 페름, 뱌트크, 볼가르 등지의 대공, 노브고로드 니조프 영토, 체르니고프, 랴잔, 폴로쯔크, 로스토프, 야로슬라프, 벨로오제르, 우도르, 오브도르, 콘딘, 그리고 시베리아의 군주이자 대공, 북방나라들의 통치자이자 리플랸드 영지와 그밖의 곳의 군주” 그리고 이반 4세는 즉위식을 계획하는데 있어 되도록이면 위엄이 있고 외경심을 불러일으킬 수 있도록 세부항목에 까지 꼼꼼한 관심을 쏟았던 군주였다.



             

         <좌> 어깨걸이를 한 이반 4세의 초상       <우> 홀과 구를 들고 있는 쌍두독수리 문양 
 

최고군주의 권위와 심볼


15-16세기에 모스크바공국을 중심으로 하는 중앙집권적 국가로의 통일이 이루어졌다. 모스크바공국은 주변의 수즈달, 블라디미르 등의 쟁쟁한 경쟁공국들을 보통 군사적으로 병합하고 때로는 구입하기도 하면서 중앙집권적 통일의 기반을 닦았다. 이런 방식으로 획득된 지배자의 권력과 권위는 세속적인 성격을 지니기 마련이었는데, 종종 종교적 색채를 띠었다. 그 이유는 모스크바가 성장하고 러시아를 통합하는 과정에서 군주들은 전제적 짜르로 변하게 되었으며, 지배자 권위의 성격과 한계가 가장 중요한 문제가 되었다.

그에 따라 전제적 권력을 정당화하고 뒷받침해주는 수많은 전설과 교의가 생겨나게 되었다. 예컨대, 16세기 초에 나타난 것으로 알려진 블라디미르 군주에 관한 이야기를 들어보자. , 모스크바군주들의 유명한 선조가 되는 키예프의 블라디미르 모노마흐는 자신의 외할아버지이자 비잔틴제국의 황제인 콘스타니누스 모노마쿠스로부터 그의 높은 지위를 상징하는 여러 표시를 받게된 경위, 즉 “모노마흐의 모자(Shapka Monomakha, Шапка Мономаха)”로 알려지게 된 머리장식과 격식을 갖춘 법복 중의 몇몇 물건을 받게 된 경위에 대한 이야기들이었다.


                                
                                             모노마흐의 모자 

17세기에 짜르의 표시는 어깨걸이(бармы), 십자가(крест), 사슬(цепь), 왕관(венец), (днржава), (скипетр)이었다. 짜르의 보고에는 7개의 왕관이 있는데, 그 가운데 모노마흐의 모자가 가장 오래되었다. 러시아의 거의 모든 군주가 그것을 썼다. 동방의 장인들이 황금 모자의 틀과 장식을 준비하였고 그 위에 러시아인들이 모피와 십자가 장식을 달았다. 모든 왕관은 이 모자의 형태에 따라 준비되었다. 군주 권위의 심볼은 주와 홀이었다

                          
                                         군주의 권위의 상징인 어깨걸이


홀은 고대 로마제국의 시대부터 널리 알려졌는데, 이반 4세가 모스크바 궁정으로 그것을 처음 가져왔다. 긴 십자가가 놓인 원형의 주는 보리스 고두노프시기에 등장한 바 있다. 대관식에서 대주교는 “이 원형구는 당신의 황제권의 표시입니다”라고 말하면서 짜르에게 주었던 것이다. 한편, 짜르의 심볼 가운데 특별한 것은 어깨걸이이다. 이것은 비잔틴황제와 러시아의 대공들이 옛날부터 어깨 위에 걸쳤던 작은 망토이다. 황제의 퍼레이드 복장에는 황금사슬이 덧붙여졌다. 보통 사슬의 갯수는 병합한 공국들과 영지의 숫자를 의미했다.


                           
                                              이반 4세의 홀, 구, 왕관                        


이반 4세의 대관식


1547 1월에 크레믈린 안에 위치해있는 우스펜스키 성당에서 최초의 짜르로서 이반 4세의 대관식이 거행되었다. 황제의 대관식은 17세기에 결정적으로 확립되었다. 성당의 한 가운데 자리가 만들어지고 나무계단으로 만든 단이 준비되었다. 그 위에 아름다운 천이 깔리고 그 위로 황제의 옥좌가 놓인다. 옥좌는 성경 속 다윗왕 생전의 삶이 장면마다 조각되어있고, 황제의 옥좌 옆으로는 대주교 마카리아를 위한 의자가 준비된다.


                                    

                                               이반 4세의 옥좌

대관식 아침 일찍 황제의 중요한 심볼, 즉 모노마흐 모자, 어깨걸이, 십자가, 황금사슬이 조심스레 성당으로 옮겨졌다. 첫 대관식에서는 구와 홀이 사용되지 않았다. 준비가 끝나고 크레믈린 안에 있는 모든 성당들에서 종이 울리면, 이반 4세는 많은 수행원을 대동하고 궁에서 나왔다. 황제의 대관식 퍼레이드 옷은 황금과 귀중한 보석들로 광채가 났다.


황제와 모든 일행은 우스펜스키 사원으로 느리게 움직였다. 아침 일찍부터 이 광경을 보기 위해 인파가 몰려들었다. 황제와 대주교는 성당의 준비된 자리로 들어가 앉고 성직자들은 계단 주위에 마련된 자리에 배치되었으며, 귀족들과 궁신들은 서서 기다렸다.

 

                                  
                                 황제대관식의 모습을 보여주는 16세기 문헌 
                   계단으로 만든 단 위에 오른 이반 4세의 머리 위로 금화를 뿌리는 장면 


군주는 참석자들에게 짧은 연설을 하였는데, 왕좌에 오르는 자신의 권리를 내세우고 자신이 황제자리에 즉위하도록 대주교에게 요청한다. 교회의 수장은 군주에게 황제의 심볼을 부여한다. , 대주교는 준비된 황제의 물건들을 하나씩 건네주면서 기도와 절을 바치고 짜르직무를 부여한다. 그 후에 예배가 시작되었다. 대주교는 성상이 장식된 휘장의 문(Царский врат)으로 군주를 데려가, 그에게 성유식을 수행하였다. 이로써 짜르는 “하느님의 기름부음 받은 자”가 될 수 있었다.

 

대관식의 마지막 순서가 되면, 이반 4세는 성당에서 나와 성당 광장으로 갔다. 귀족들은 그에게 금화를 붓는데, 옛부터 전해내려 온 이 의식은 부유함과 안녕을 의미하였다. 아름다운 천을 밟으면서, 황제는 크레믈린 성안에 있는 여러 성당으로 들렀다. 처음에는 선조의 무덤에 인사를 하기 위해 아르한겔스키 성당을, 다음에는 블라고베셴스키 성당을 들른다. 성당에서 나올 때마다 귀족들을 황제에게 금화를 뿌린다. 그것을 마지막으로 군주는 궁전으로 돌아갔던 것이다.

 


 

표트르대제와 서구식 의복 수용



러시아 복식의 혁명
 

표트르대제는 종종 반대를 무릅쓰고 명령과 칙령을 통해 러시아 상층부에 서유럽식 복장, 생활양식과 관습을 도입하고자 애썼다. 일상생활과 밀접한 것에서부터 변화가 일어났다. 표트르대제는 1699년 러시아에 처음으로 율리우스달력을 도입하였다. 1700 1월부터 새해가 시작되는 율리우스역법의 차용은 1917년 혁명 전까지 존속되었다.


                           
                   복식 개혁 이후 서구식 복장의 차용을 보여주는 18세기의 민화

그와 함께 수염을 강제로 깎도록 한 것은 표트르 대제의 통치방식과 그 시대의 성격을 잘 보여준다. 정부는 “국가 봉직과 무관 관직의 영예와 단정함을 위해” 시민에게 수염을 깎을 것을 명령하였다. 정교도에게 수염은 중요한 종교적 상징이었다. 정교전통을 고수하는 전통주의자들은 면도가 인간에게 깃든 신의 모습을 훼손하고 러시아인들을 루터파 교인, 폴란드인, 칼미크인, 타타르인, 고양이, , 원숭이 같은 불쾌한 존재들처럼 보이게 만든다는 이유에서 반대했는데, 정부는 수염세를 내는 경우에는 수염을 기를 것을 허용하였다
 
                   
                                            표트르대제의 초상화   

한편, 당시까지 귀족 여성들은 격리되어 왔는데, 표트르대제의 명령에 의해 여성들은 황제가 여는 무도회에 참석해야 했다. 여성들은 어깨를 내놓는 유럽식 드레스를 입었으며, 이러한 사교모임은 당시에 엄청난 풍파를 일으켰다


      

             
                                <좌우> 표트르 대제가 참석하는 무도회 모임 

    
그렇지만, 표트르대제 치세 마지막 무렵에는 모스크비와 상트 페테르부르그의 상류층에 속하는 사람들, 중간층의 공직을 맡은 관리들과 육해군 장교들이 수염을 깎고, 서구식 복장을 하였다.


  

의복에 대한 통제


1700
년에 러시아의 의복을 유럽식으로 변경하는 칙령이 공포되었다. 러시아에 헝가리식, 독일식 복장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장소에 새로운 유럽식 복장이 전시되었다. 러시아 전통의 구식 옷을 바느질하고 판매하는 것은 금지되었을 뿐만 아니라 위반하는 사람에게는 다음의 처벌이 내렸다. , 순경이 구식의 긴 옷을 입은 사람을 잡아 벌금을 내라고 요구하는데, 돈을 내지않고 반항하는 경우에 순경은 위반자의 무릎을 꿇게 해서 지면에 닿는 길이 만큼 카프탄의 깃을 잘라냈다. 그런 방식으로 러시아 상류층에 유럽식 복장이 들어오게 되었다.

 

                          
                                                      18세기의 판화
                     전통복장을 한 남성을 끓어앉히고 카프탄을 자르는 장면


표트르대제와 수염세


복장 교체에 뒤이어 표트르대제는 러시아인들에게 정교도의 상징으로 간주되는 수염을 깎기를 명령하였다. 평범한 시민들은 수염을 깎지 않으면 안되었다. 복종할 줄 모르는 구귀족의 수염은 짜르가 직접 수염을 자르기도 하였다. 물론 면도에서 벗어날 수는 있었다. 즉 상인의 경우에 100루블, 관리와 귀족의 경우에 60루블, 도시주민의 경우에 30루블을 내면 시민들이 수염을 기를 수 있었다. 그리고 납부자들은 수염표시(borodovoi znak)의 동전을 받았다. , 이것은 둥근 동전으로, 한쪽 면에 턱수염과 콧수염, 그리고 돈 징수라는 글씨가 새겨졌다. 그런데 표트르시대의 새로운 수용은 농민과 성직자에게 해당되지는 않았다.

 

                                                  
                                        18세기 귀족의 예복용 카프탄
                                             카프탄 속에 화려한 조끼 캄졸 착용  
 

18세기의 사치와 유행


표트르통치 시기에 최초의 멋장이(modniki)가 등장했다. 시베리아의 총독 마트베이 가가린공은 옷 전체에 보석을 박은 퍼레이드복장을 가지고 있었다. 그의 짧은 부츠 한켤레는 1만루블에 해당했다. 사치에 대한 사랑은 결국 재앙의 원인이 되었다. 왜냐하면 표트르대제는 가가린 공을 횡령죄로 체포하여 사형에 처했으며, 그의 전 재산을 일시에 몰수하였던 것이다.

18세기 전반에 걸쳐 러시아귀족의 복장이 바뀌었다. 길고 평퍼짐한 형태의 의복에서 부터 짧고 좁은 유럽식 의복으로 바뀌었다. 처음에 귀족들은 레이스 커프스가 달리고 가슴부분에 레이스가 있는 흰색의 셔츠를 입었는데, 목에는 넥타이를 했다. 셔츠 위에는 팔이 길고 좁은 조끼(kamzol)를 입었는데, 그것은 화려한 실크 천에 많은 수의 단추로 장식이 되어 있었다. 조끼 위로 큰 주머니가 양쪽에 달린 겉 옷으로 카프탄(kaftan)을 입는다. 카프탄의 앞섶과 소매부분은 금사나 은사로 화려하게 바느질이 되었고, 비록 잠그지는 않았지만 멋진 금속 단추를 달았다.

18세기에 유행의 중심은 프랑스였으므로 프랑스식의 이름이 붙은 옷이 매우 많았는데, 예컨대 퀼로트가 그런 경우였다. 귀족들은 하얀색 실크 긴양말을 신고 퀼로트를 입었다. 남자들은 굽이 높지 않은 단화를 신었다. 보석창고(Oruzheinaia palata)에는 귀중한 옷과 신발이 보존되었는데, 그 중에서 낡아빠진 기병용 장화는 표트르대제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키릴 라주몹스키 백작이라는 사람은 금강석과 루비가 장식된 2만 루블짜리 지팡이를 지니고 있었다.

 

가발과 모자


18
세기에는 가발이 유행하였다. 가발은 대머리를 숨길 수 있었고 머리 모양을 맵시있게 해주었고 외모와 풍채를 좋게 만들어주었다. 당시에 가발생산의 중심지는 파리였으며, 러시아인들도 이곳으로 가발을 주문하였다. 가발은 보통 자연산 머리카락과 그 외에 양모와 비단실도 종종 사용되었다. 남자가발은 18세기 내내 변화없이 유행하였으며 처음에는 다소 길었는데 “푸들형”이나 “사자형” 등이 있었다.


                                     
                                  최고문관 대신 골로브킨(G.I.Golovkin)의 초상


한편, 귀족의 의복에는 장검과 모자가 포함되었다. 긴 가발위에는 보통 모자를 쓰지 않았으며, 왼쪽 팔은 정중한 인사를 하기 위해 언제나 굽힐 자세가 되어있었다. 표트르대제 시대에는 삼각형 모자를 썼는데, 앞쪽으로 경사지게 해서 썼다. 그렇지만 그것은 불편했기 때문에 곧 2각 모자로 바뀌었다. 2각 모자의 사용은 러시아에서 오래 지속되었는데, 궁신과 관리들은 1917년 혁명 전까지 2각 모자를 착용하였다.